2008년 환율이 빠르게 오르던 날, 수출 중소기업의 장부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달러로 받을 수출대금의 원화 가치는 커졌는데 회사의 자금 사정은 더 나빠졌다. 은행과 맺은 키코 계약 때문이었다. 계약에서 정한 환율 구간을 벗어나자 기업은 실제로 받은 달러보다 많은 금액을 약정환율에 팔아야 했다. 수출이익으로 환손실을 메우는 수준을 지나, 계약 자체에서 거액의 지급의무가 생겼다.
키코(Knock-In Knock-Out, KIKO)는 환율변동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설계된 통화옵션 계약이다. 이름만 보면 두 개의 경계가 있다. 환율이 아래쪽 경계에 닿으면 계약이 사라지는 녹아웃(knock-out), 위쪽 경계에 닿으면 기업의 달러 매도 의무가 커지는 녹인(knock-in) 조건이다. 기업은 일정한 환율로 달러를 팔 권리를 얻는 대신, 환율이 크게 오를 때 은행이 달러를 살 권리를 제공한다. 문제는 양쪽 권리의 크기가 같지 않은 계약이 많았다는 데 있었다.
가장 단순한 거래를 보자. 수출기업이 3개월 뒤 100만 달러를 받을 예정이라면 100만 달러의 환율을 고정하는 선물환 계약은 실제 수출대금과 규모가 맞는다. 원화가 강해져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계약이 보완하고, 원화가 약해져 달러 가치가 오르면 계약 손실을 수출대금의 환차익이 상쇄한다. 좋은 헤지는 사업에서 생긴 위험을 반대 방향의 거래로 줄인다.
키코 계약에서는 환율이 일정 구간에 머물 때 기업이 시장환율보다 유리한 약정환율로 달러를 팔 수 있었다. 대신 환율이 상단을 넘으면 기업은 계약금액의 2배 또는 그 이상의 달러를 약정환율에 팔아야 하는 구조가 들어갔다. 실제 수출대금이 100만 달러인데 200만 달러를 팔 의무가 생기면 부족한 100만 달러는 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사 와야 한다. 환율이 더 오를수록 이 차이는 커진다.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양과 방향을 바꿨다.
계약이 많이 체결되던 시기에는 원화 강세가 이어졌다. 수출기업은 달러를 원화로 바꿀 때 받을 금액이 줄어드는 일을 걱정했다. 일부 기업은 여러 은행과 계약을 맺었다. 개별 은행은 자기 계약 규모를 알았지만 기업 전체의 환노출과 다른 은행 계약을 모두 알기 어려웠다. 기업도 수주액, 결제 시점, 계약 취소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잡으면 실제 수출액보다 큰 헤지를 하게 됐다. 계약이 중첩될수록 위쪽 환율에서 팔아야 할 달러는 늘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제를 바꿨다.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고 녹인 조건이 작동했다. 기업은 평가손실뿐 아니라 결제일마다 현금을 내야 했다. 제조업의 돈은 매출이 발생했다고 바로 들어오지 않는다. 원재료를 사고 임금을 지급한 뒤 수출대금을 받는다. 키코 결제금이 그 사이에 빠져나가자 흑자를 내던 기업도 유동성 부족을 겪었다. 일부 기업은 회생절차나 도산으로 갔다. 손실액의 크기뿐 아니라 현금이 빠져나간 시점이 기업의 생존을 갈랐다.
이 사건을 ‘환율 방향을 잘못 본 기업의 실패’라고만 쓰면 계약의 구조가 사라진다. 반대로 모든 기업을 같은 처지의 피해자로 묶어도 정확하지 않다. 기업마다 실제 수출액, 계약금액, 거래 은행 수, 설명 내용, 재무담당자의 경험이 달랐다. 환위험을 줄일 목적의 계약도 있었고, 실제 노출액을 넘은 부분도 있었다. 법원은 계약 하나가 아니라 이런 사정을 구체적으로 살폈다.
법과 기관이 본 것
확정된 사실의 층위에서, 키코 계약은 환율 구간에 따라 기업과 은행의 권리·의무가 비대칭적으로 바뀌는 장외파생상품이었다. 금융위기 뒤 다수 기업이 손실을 입었고 계약의 불공정성, 적합성, 설명의무를 둘러싼 소송이 이어졌다.
사법 판단의 중심에는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다. 대법원은 키코 계약의 구조만으로 민법상 불공정한 법률행위나 약관규제법상 무효라고 일률적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환율 상승 때 기업의 손실 가능성이 크다는 사정만으로 계약 전체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였다. 다만 은행이 고객 기업의 거래 목적, 재산상태, 환위험 관리 필요와 경험을 고려해야 하고, 상품의 위험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는 원칙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개별 사건의 설명의무 위반과 손해배상 범위는 구체적 사실에 따라 달라졌다.
기관 판단은 다른 시점의 자료를 다뤘다. 금융감독원은 2018년 재조사를 시작했고, 2019년 분쟁조정위원회는 일부 기업 사례에서 은행의 불완전판매 책임을 인정해 손실액의 일정 비율을 배상하도록 권고했다. 이 권고는 법원의 확정판결이 아니었다. 소멸시효, 이미 끝난 소송의 기판력, 은행의 수락 여부가 얽혔다. 일부 은행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조사로 불법이 새로 확정됐다”거나 “대법원 판결로 모든 판매행위에 문제가 없었다”고 쓰는 것은 모두 맞지 않는다.
은행의 주장에도 기록할 부분이 있다. 은행들은 기업이 환율 전망과 수출 규모를 알고 계약했고, 상품 가격에는 기업이 얻는 유리한 환율 조건의 대가가 반영됐다고 주장했다. 기업 측은 손실 배수와 중도해지 비용, 환율 급등 시 현금부담을 충분히 듣지 못했고 은행이 위험관리 능력을 과대평가했다고 맞섰다. 양쪽 주장을 가르는 것은 계약서에 위험 문구가 있었는지만이 아니다. 누가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계약 규모를 정했고, 최악의 경우를 숫자로 설명했는지가 중요했다.
감독 현장에서 파생상품 분쟁을 보면 상품명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문서가 있다. 기업의 수출실적, 향후 수주 예상, 다른 은행과의 계약, 이사회 또는 내부 승인자료다. 헤지 대상이 100인데 계약이 200이면 초과된 100의 경제적 성격을 설명해야 한다. 예상 수출액은 확정된 돈이 아니다. 주문 취소와 결제 지연이 생기면 헤지 비율도 달라진다. 계약 체결 때 적절했던 규모가 몇 달 뒤에도 적절하다는 보장은 없다.
키코가 남긴 교훈을 ‘복잡한 파생상품은 위험하다’로 줄일 수는 없다. 단순한 선물환도 규모와 만기가 맞지 않으면 투기가 될 수 있다. 복잡한 옵션도 실제 위험과 한도를 맞추고 최악 손실을 감당할 수 있다면 위험관리 수단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사업의 현금흐름과 계약의 현금흐름이 얼마나 정확히 반대로 움직이는가이다.
헤지 계약의 가격도 살펴야 한다. 키코는 가입 때 별도 수수료를 내지 않는 ‘제로 코스트’ 구조로 소개되곤 했다. 현금으로 내는 초기 비용이 없다는 뜻에 가깝다. 기업이 은행에 제공한 옵션에도 가치가 있고, 양쪽 옵션 가치가 맞도록 행사가격과 배수가 정해진다. 비용이 0원이라는 말과 경제적 대가가 없다는 말은 다르다. 기업이 유리한 약정환율을 얻은 대가로 어떤 불리한 조건을 제공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중도해지가격은 더 낯설다. 환율이 크게 움직인 뒤 계약을 끝내려면 남은 옵션의 시장가치를 정산해야 한다. 기업은 앞으로 생길 손실을 당장 현금으로 지급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 거래소 가격이 있는 상품과 달리 장외계약의 해지가격은 은행의 평가모형과 시장변수에 따라 계산된다. 독립된 가격을 구하기 어렵다면 고객은 계약을 유지할지 끝낼지 판단하기 힘들다. 판매 때 중도해지비용의 산정 원리와 예시를 제시해야 하는 이유다.
계약 규모를 정하는 절차도 한 번으로 끝낼 수 없다. 수출기업의 매출은 주문 취소, 납기 지연, 원재료 수입, 외화대출에 따라 순노출액이 달라진다. 달러 매출만 더하면 실제 위험을 과대평가할 수 있다. 달러로 지급할 원재료비와 이자를 빼고, 받을 시점과 계약 결제일을 맞춰야 한다. 월별 노출액을 다시 계산해 한도를 조정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헤지였던 거래가 시간이 지나 초과포지션이 된다.
은행도 고객의 다른 거래를 모른다는 이유로 확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기업에 전체 계약현황과 외화현금흐름을 정기적으로 제출하게 하고, 자료가 없으면 새 계약 한도를 보수적으로 잡을 수 있다. 기업 이사회는 환율 전망보다 손실한도를 승인해야 한다. “환율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는 맞히기 어렵지만 “한 달에 현금이 얼마 이상 빠져나가면 생산이 멈추는가”는 회사가 정할 수 있다.
회계처리도 경고를 줄 수 있다. 파생상품 평가손익이 커지면 실제 결제 전이라도 재무제표에 변동이 나타난다. 경영진은 평가손실을 일시적인 숫자로 치부하지 말고 결제월별 현금수요로 바꿔 봐야 한다. 감사인과 이사회 감사기구는 계약의 공정가치뿐 아니라 실제 수출노출과의 대응관계를 확인해야 한다. 헤지회계를 적용받는다는 사실이 경제적 헤지의 적정성을 자동으로 보증하지 않는다.
제조업 대표에게 환율은 화면의 숫자가 아니다. 원재료 가격, 수출단가, 임금, 납품기일에 동시에 영향을 준다. 환율이 올랐다는 뉴스와 회사 통장에 현금이 늘었다는 말은 같지 않다. 키코 손실은 계약일의 평가액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제자금 마련, 신용등급 하락, 대출 회수, 거래처 불안으로 이어졌다. 기업이 법정에서 계약의 의미를 다투는 동안 공장의 주문과 고용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다음 계약에서 확인할 것
- 실제 외화 수입액과 계약금액은 월별로 얼마나 맞는가. - 환율이 과거 관측범위를 벗어나면 최대 지급액과 현금 결제일은 어떻게 되는가. - 다른 금융회사와 체결한 계약을 합친 총 헤지 비율은 얼마인가. - 중도해지 때 누가 가격을 계산하며, 기업은 그 가격을 검증할 수 있는가.
위험을 닫기 위해 만든 문에는 반대편에서 열리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계약서에서 찾아야 할 것은 ‘헤지’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손잡이를 누가, 어느 환율에서 잡게 되는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