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거래내역에는 비슷한 이름의 상품이 여러 줄 적혀 있었다. 가입 뒤 6개월이나 1년이 지나면 조기상환됐고, 원금과 수익은 다시 다음 상품으로 들어갔다. 몇 차례 같은 경험을 한 고객에게 주가연계증권(ELS)은 낯선 파생상품보다 만기가 조금 유동적인 정기상품에 가까워졌다. 2021년 높은 수준에서 발행된 홍콩 H지수 연계 ELS가 2024년 만기를 맞자 그 익숙한 거래내역에 큰 손실이 찍혔다.
홍콩 H지수는 홍콩시장에 상장된 중국 기업의 주가 흐름을 나타내는 지수다. ELS는 이 지수를 직접 사는 상품이 아니다. 발행 증권사가 정한 조건에 따라 수익을 지급할 의무를 지는 증권이다. 은행 고객은 은행에서 신탁이나 펀드 형태로 가입하기도 했다. 지수가 오르면 수익이 무한히 커지는 구조가 아니다. 정해진 평가일에 일정 수준 이상이면 원금과 약정수익을 받고 끝난다. 반대로 지수가 크게 하락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손실이 원금에 반영된다.
많은 ELS에는 6개월마다 조기상환을 판단하는 구조가 들어 있다. 최초 기준가격의 90%, 85%, 80%처럼 평가 기준이 차례로 낮아진다. 지수가 기준 이상이면 상품은 끝난다. 그동안 주요 지수가 장기간 급락하지 않으면 대부분 조기상환된다. 고객은 만기 3년 상품에 가입했지만 실제로는 6개월이나 1년 만에 돈을 돌려받는 경험을 한다. 성공한 경험이 반복되면 계약의 최종 만기와 손실조건은 기억에서 멀어진다.
여기에 재가입이 더해졌다. 조기상환된 돈을 다시 같은 종류의 상품에 넣으면 고객의 거래기간은 상품 한 건의 만기보다 길어진다. 첫 상품은 낮은 지수에서 가입해 상환됐지만 다음 상품은 더 높은 지수에서 시작할 수 있다. 매번 상품은 새 계약이지만 고객은 이전 수익의 연장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위험의 기준점은 가입 때마다 다시 정해진다.
2021년 홍콩 H지수가 높았던 시기에 판매된 상품들은 이후 중국 경기 둔화, 부동산시장 불안, 미·중 갈등 등의 영향으로 지수가 크게 하락하면서 손실구간에 들어갔다. 판매는 특정 시기에 집중됐고 만기도 2024년에 몰렸다. 개별 고객의 계약이 모이면 금융회사와 사회 전체가 같은 달력의 위험을 갖게 된다. 한 상품의 구조만 보는 심사로는 판매총량과 만기집중을 놓칠 수 있다.
낙인형과 노낙인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낙인형은 상품기간 중 지수가 정해진 하락선에 한 번이라도 닿았는지를 본다. 노낙인형은 보통 만기 평가가격을 중심으로 손실을 정한다. 노낙인이라는 이름은 손실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중간에 큰 폭으로 떨어졌어도 만기에 회복하면 상환될 수 있다는 뜻에 가깝다. 반대로 만기 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지수 하락률에 따라 원금손실이 날 수 있다.
과거의 성공은 어떤 설명이었나
확정된 사실은 H지수 연계 ELS가 은행권에서 대규모로 판매됐고, 2024년 만기 도래분에서 손실이 현실화됐다는 것이다. 판매잔액, 만기도래액, 손실액, 배상액은 같은 숫자가 아니다. 잔액은 아직 끝나지 않은 계약을 포함한다. 만기도래액은 해당 기간 평가가 끝나는 원금이다. 손실액은 상환 결과로 줄어든 금액이고, 배상액은 판매과정의 책임을 반영해 금융회사가 고객에게 지급하는 금액이다.
금융감독원은 2024년 검사결과와 분쟁조정기준안을 발표했다. 기관 판단은 판매사 책임과 투자자별 사정을 함께 반영하는 방식이었다. 기본배상비율에 판매사의 가중·감경 요인과 투자자의 가입목적, 연령, 투자경험 등을 더하거나 빼도록 했다. 은행들은 이 기준을 바탕으로 자율배상 절차를 진행했다. 자율배상은 당사자 사이의 합의다. 법원이 모든 계약에 대해 확정한 배상판결과 같지 않다. 합의하지 않은 고객은 별도의 분쟁조정이나 소송을 선택할 수 있다.
은행 측이 내세울 수 있는 사정도 있다. 장기간 ELS 거래를 반복하고 손실 가능성을 확인한 고객이 있었고, 상품설명서와 녹취에 위험이 제시된 경우도 있다. 고객 측에서는 반복 권유와 은행에 대한 신뢰, 고령 또는 투자 이해도의 차이, 위험등급 설명의 형식화를 문제 삼았다. 같은 상품이라도 판매책임이 모두 같지 않은 이유다. 배상비율표가 있어도 상담기록과 거래이력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필자가 이 사건에서 더 무겁게 보는 것은 ‘경험’의 해석이다. 금융회사는 반복 가입을 투자경험으로 본다. 고객도 몇 차례 수익을 받으면 자신이 상품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손실구간을 한 번도 겪지 않은 반복은 위험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조기상환만 경험한 사람에게는 상품의 좋은 절반만 학습된 셈이다. 판매자는 거래횟수뿐 아니라 고객이 손실구조를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ELS는 조건부 계약이다. “지수가 오를 것인가”만 물으면 구조를 절반만 본다. 어느 지수가, 최초 기준의 얼마까지, 어느 평가일에 내려가면, 원금이 어떤 비율로 줄어드는지를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삼으면 가장 성과가 나쁜 지수가 결과를 정하는 경우가 많다. 평균이 아니라 최저 성과를 봐야 한다.
지수라는 이름도 안전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개별 종목보다 분산돼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특정 국가의 산업구조와 정책위험이 함께 반영된다. H지수 구성종목과 비중은 변하고, 중국 기업의 이익뿐 아니라 홍콩시장의 유동성과 환율, 국제정치가 가격에 영향을 준다. “지수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지수가 큰 폭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ELS 수익률은 예금금리와 같은 방식으로 비교하기 어렵다. 조기상환되면 실제 투자기간이 짧아지고, 상환에 실패하면 최종 만기까지 돈이 묶인다. 표시된 연 수익률을 받는 기간이 확정돼 있지 않다. 중도상환을 요구하면 시장가격으로 계산한 금액을 받고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생활자금의 필요시점이 조기상환 예상에 의존하면 지수 하락과 유동성 부족이 동시에 온다.
판매사는 기초자산별 총노출을 고객 단위와 회사 단위로 모두 봐야 한다. 고객 한 명이 자산의 10%만 ELS에 넣었다 해도 은행 전체가 같은 지수의 높은 기준가격 구간에서 대규모로 팔았다면 만기손실과 민원이 한 시기에 집중된다. 제조사가 여러 곳이라는 사실도 기초자산 집중을 줄이지 못한다. 발행사 신용위험과 시장위험은 별도 축이다.
상품 만기 뒤 배상 절차에서는 고객의 과거 수익을 어떻게 볼지도 논쟁이 된다. 이전 거래에서 받은 이익은 같은 상품군의 이해경험을 보여줄 수 있지만 이번 계약의 손해와 자동으로 상계되는 것은 아니다. 배상은 이번 판매행위의 위법·부당성과 인과관계, 고객의 책임을 기초로 계산해야 한다. 과거 성공이 판매사의 잘못을 지우지도 않고, 고객의 반복 가입이 모든 설명의무를 면제하지도 않는다.
기준가격 산정일도 확인해야 한다. 가입일의 장중 지수가 아니라 발행조건에서 정한 종가나 평가기관의 가격이 최초 기준이 된다. 휴장, 시장중단, 지수산출 변경이 생기면 대체 평가방법이 적용될 수 있다. 고객이 뉴스를 보고 확인한 지수와 상품의 공식 평가가격이 다를 수 있으므로 설명서의 평가일·평가방법을 읽어야 한다.
발행 증권사의 신용도는 기초지수와 별개다. 지수가 상환조건을 충족해도 발행사가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손실이 날 수 있다. 은행이 신탁으로 판매했더라도 발행사 위험이 예금자보호로 바뀌지 않는다. 여러 발행사로 나누는 것은 신용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같은 지수에 대한 시장위험은 그대로 남는다.
조기상환 뒤 재가입을 권유할 때에는 최초 가입 당시의 투자성향을 그대로 쓰지 않아야 한다. 나이, 소득, 금융자산, 생활비 필요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은퇴 뒤 정기소득이 줄면 같은 손실률을 감당할 능력도 달라진다. 거래경험이 늘었다는 한 항목으로 위험감수능력의 감소를 덮어서는 안 된다.
배상절차의 투명성은 신뢰회복에 중요하다. 은행은 산정표의 기본비율과 가감요인을 계약자에게 설명하고 이의제기 자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신속한 합의를 이유로 포괄적인 권리포기를 요구한다면 범위와 효과를 명확히 알려야 한다. 금융당국은 은행별 배상속도뿐 아니라 유사사례의 일관성과 취약고객 처리도 점검해야 한다.
은행의 상품관리도 판매시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특정 기초자산과 만기에 판매가 몰리면 본점은 고객군, 재가입률, 손실 시나리오를 묶어서 봐야 한다. 개별 고객에게 적합한 상품이더라도 수십조 원이 같은 방향과 시기에 노출되면 시장과 평판의 위험이 달라진다. 판매량을 늘리는 영업회의와 위험을 제한하는 상품위원회가 같은 자료를 봐야 한다.
다음 가입에서 확인할 것
- 기초자산이 여러 개라면 평균이 아니라 가장 나쁜 자산이 결과를 정하는가. - 조기상환에 실패한 뒤 최종 만기까지 필요한 생활자금을 따로 확보했는가. - 최초 기준가격이 최근 고점 부근인지, 과거 하락 때 손실이 어떻게 났는가. - 이전 조기상환 경험을 안전의 증거로 쓰고 있지 않은가.
익숙함은 위험을 없애지 않았다. 다만 위험을 묻는 질문을 줄였다. 거래내역의 여러 줄이 증명한 것은 상품의 안전이 아니라, 그동안 손실조건이 현실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