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은행 예금과 채권의 금리가 두 자릿수인 시기가 있었다. 보험회사는 장기 저축성보험과 연금보험을 팔면서 높은 예정이율을 제시했다. 계약자는 수십 년 뒤 받을 돈을 약속받았고 보험회사는 받은 보험료를 더 높은 수익률로 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의 금리 안에서는 양쪽 계산이 맞는 듯했다.
계약서의 약속은 시장금리가 내려간다고 함께 낮아지지 않는다. 확정형 상품의 보험금과 환급금은 계약 때 정한 이율을 바탕으로 계산된다. 10년, 20년이 지나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운용수익률이 크게 낮아져도 회사는 약정한 급부를 지급해야 한다. 오래된 계약의 금리는 계약자에게 권리이고 보험회사에는 부채가 된다.
보험료가 들어오면 전부 그대로 쌓이지 않는다. 사업비와 위험보험료 등을 제외한 금액이 적립되고, 보험회사는 채권·대출·주식·부동산 등에 운용한다. 여기서 얻는 수익으로 장래 보험금과 비용을 충당한다. 자산운용수익률이 계약에 약속한 부담금리보다 낮으면 금리 역마진이 생긴다. 새 계약을 많이 팔아 보험료가 들어와도 오래된 고금리 부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간의 차이가 문제를 키운다. 보험부채는 20년이나 30년 뒤까지 이어지지만 회사가 가진 채권은 그보다 짧게 만기될 수 있다. 만기된 채권의 돈을 낮은 금리로 다시 투자하면 수익은 줄어든다. 부채의 약속은 그대로다. 자산과 부채의 현금흐름 시기를 맞추는 자산부채관리(ALM)가 필요한 이유다. 금리 수준뿐 아니라 만기, 해지, 보험금 지급시점을 함께 관리해야 한다.
외환위기는 다른 충격을 더했다. 기업 부도와 자산가격 하락으로 보험회사가 가진 대출과 유가증권의 가치가 나빠졌다. 고금리 계약의 부담은 남아 있는데 운용자산에서 손실이 발생했다. 일부 보험회사는 지급여력이 악화됐고 퇴출, 합병, 계약이전 같은 구조조정을 거쳤다. 계약자에게는 낯선 회사로 보험계약이 옮겨지는 일이 생겼다.
보험회사 구조조정에서 중요한 것은 회사를 살리는 일과 계약을 지키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부실 회사의 주주와 경영진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보험계약이 장기간 이어지고 다수의 생활보장을 담고 있으므로 계약자에게 급격한 손실이 가지 않도록 계약을 다른 회사로 이전하거나 공적 안전망을 활용한다. 회사는 사라질 수 있어도 계약의 처리 원칙은 남아야 한다.
같은 계약을 보는 두 사람
확정된 사실의 층위에서, 과거 고금리 확정형 상품은 이후 저금리 환경에서 보험회사의 이차역마진 부담을 키웠다. 외환위기 전후 다수 보험회사가 경영개선 명령, 인수·합병, 계약이전 등의 구조조정을 겪었다. 회사별 부실 원인은 달랐다. 고금리 상품만으로 모든 퇴출을 설명할 수 없다. 자산부실, 대주주 문제, 영업확장과 비용구조도 함께 봐야 한다.
기관 판단은 당시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의 조치 자료에서 확인된다. 지급여력 기준에 미달한 회사에 경영개선 조치가 내려졌고, 계약자 보호를 위해 계약이전과 자금지원이 사용됐다. 현재의 신지급여력제도(K-ICS)와 국제회계기준 IFRS17을 과거 사건에 그대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제도는 자산과 보험부채를 시장가치에 가깝게 평가하고 위험을 세분화하지만, 당시 규정과 회계는 달랐다.
계약자는 보험회사에 돈을 빌려준 투자자와 같지 않다. 사망보장이나 노후소득처럼 다른 곳에서 즉시 대체하기 어려운 권리를 샀다. 계약이전이 이뤄져 보험금 지급이 이어져도 불안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 회사의 서비스, 배당, 추가납입 조건, 해지 선택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특히 고령 계약자는 새 계약으로 갈아타면 나이와 건강상태 때문에 불리해질 수 있다.
보험회사의 입장에서는 장기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건전성을 관리해야 한다. 계약자에게 유리한 확정금리를 무조건 나쁜 상품으로 부를 수는 없다. 문제는 회사가 그 약속의 가격을 제대로 계산하고 충분한 자본을 쌓았는가이다. 판매할 때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부담은 수십 년 뒤 경영진에게 넘기는 보상구조라면 장기계약과 맞지 않는다.
금리가 내려가면 장기채권 가격은 오른다. 동시에 장기 보험부채의 현재가치도 커질 수 있다. 자산과 부채의 만기가 맞으면 변화가 어느 정도 상쇄된다. 부채가 훨씬 길면 금리 하락 때 부채 가치가 더 크게 늘어난다. 보험 건전성은 자산수익률 하나로 판단할 수 없다. 자산과 부채가 같은 금리 변화에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지를 봐야 한다.
필자의 감독 경험에서 보험회사의 위험은 현재 손익보다 긴 시간표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 이익이 났다는 사실이 20년 뒤 약속을 충분히 준비했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책임준비금이 늘어 현재 이익이 줄었다고 당장 현금이 빠져나간 것도 아니다. 회계 숫자와 실제 지급시점을 함께 읽어야 한다.
책임준비금은 계약자에게 지급할 미래 보험금을 현재 가치로 계산해 쌓는 부채다. 계산에 쓰는 할인율이 높으면 먼 미래의 돈은 작게 보이고, 할인율이 낮으면 크게 보인다. 같은 계약이라도 평가기준이 바뀌면 부채가 달라진다. 준비금 증가는 현금지출이 아니라 약속의 현재가격이 높아졌다는 신호일 수 있다. 회사의 자본이 그 변화를 견딜 만큼 충분한지 봐야 한다.
해지율 가정도 중요하다. 고금리 계약을 가진 고객은 시장금리가 낮을 때 해지할 이유가 적다. 회사가 과거 평균을 근거로 많은 계약이 중간에 해지될 것으로 예상하면 실제 부채를 작게 잡을 수 있다. 금리가 내려갈수록 좋은 조건의 계약은 더 오래 남는다. 불리한 부채가 선택적으로 유지되는 현상을 자산운용 계획에 반영해야 한다.
새 회계기준은 보험서비스 결과와 금융손익을 나누고 미래이익을 계약서비스마진으로 인식한다. 숫자의 투명성을 높이지만 모형과 가정의 복잡성도 커진다. 투자자는 당기순이익만 보지 말고 경제적 가정 변경, 지급여력비율, 자산부채 듀레이션을 함께 읽어야 한다. 감독기관도 회사 간 가정 차이를 비교하고 낙관적인 장기 전망을 점검해야 한다.
계약이전 때 계약자의 선택권도 설명해야 한다. 보험계약은 원칙적으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다른 회사로 옮겨지고 보장내용이 유지되지만, 배당이나 부가서비스 등 세부 조건에서 확인할 부분이 생길 수 있다. 계약자가 불안해 해지하면 해지환급금이 납입보험료보다 적거나 대체 보장을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안내문에는 회사 이름의 변경보다 유지·해지·변경 각각의 금액과 권리가 먼저 적혀야 한다.
고금리 계약을 보유한 회사가 새 상품의 금리를 낮추거나 보장구조를 바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그러나 새 계약자의 보험료로 과거 계약의 부족분을 계속 메우는 방식은 세대 간 형평 문제를 낳는다. 상품군별 손익과 부담금리를 분리해 보고하고, 오래된 계약의 비용을 자본과 자산운용으로 감당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성장률을 유지하려고 새 저축성보험을 과도하게 판매하면 부채의 만기만 더 길어진다.
재보험은 위험을 다른 보험회사에 나누는 수단이지만 금리역마진을 자동으로 없애지 않는다. 어떤 위험을 이전하고 재보험사가 어느 조건에서 지급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재보험사의 신용위험과 계약 해지 가능성도 남는다. 보험부채를 줄여 보이기 위한 거래인지 실제 위험이 이전됐는지 감독기관이 경제적 실질을 확인해야 한다.
회사의 지급여력비율이 규제기준을 넘는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 없다. 금리·주가·해지율을 바꾼 스트레스 결과와 자본의 질을 함께 봐야 한다. 후순위채 같은 자본성 증권은 손실흡수 능력을 높이지만 만기와 이자비용이 있다. 일시적인 자본확충과 장기 수익구조 개선을 구분해야 한다.
계약자 보호기금과 예금보험제도도 한도를 갖는다. 대형 보험회사 여러 곳이 동시에 어려워지면 제도의 재원과 처리능력이 시험받는다. 사후 보호장치가 있다는 이유로 사전 건전성 감독을 약하게 할 수 없다. 보험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산·부채와 영업을 관리하는 비용이 대규모 구조조정 비용보다 작다.
보험회사를 볼 때 확인할 것
- 계약의 보장이 확정금리인지 공시이율 연동인지, 최저보증이 있는가. - 회사 자산과 보험부채의 평균 만기가 얼마나 다른가. - 높은 현재 이익이 준비금 가정이나 자산매각에 의존하지 않는가. - 계약이전이나 회사 합병 때 보장내용과 계약자 권리가 어떻게 유지되는가.
약속은 오래될수록 계약자의 삶에 깊이 들어온다. 금융에서 오래된 약속에는 반드시 가격이 있다. 그 가격을 계약 뒤에 숨기지 않고 매년 다시 계산하는 일이 보험감독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