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9일 장이 끝난 뒤 한미약품은 미국 제약회사 제넨텍과 체결한 항암신약 기술수출 계약을 공시했다. 계약 규모는 단계별 성과금까지 합치면 1조 원을 넘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투자자가 거래화면에서 본 첫 정보는 이 호재였다. 주가는 강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개장 뒤 회사가 내놓은 두 번째 공시는 방향이 달랐다. 독일 베링거인겔하임이 전년도에 도입한 폐암신약 올무티닙의 권리를 반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 사이에는 하루가 놓여 있었다. 시장에서 하루는 달력의 한 칸이 아니다. 주문이 체결되고 손익의 주인이 바뀌는 시간이다. 두 번째 공시가 나오기 전에 주식을 산 사람은 첫 번째 공시가 보여준 미래에 값을 지불했다. 앞서 악재를 알고 주식을 판 사람의 거래는 전혀 다른 정보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사건이 남긴 질문은 공시가 늦었는지만이 아니다. 회사가 서로 반대 방향의 중요정보를 거의 같은 시기에 갖게 됐을 때 어떤 순서와 속도로 시장에 알려야 하는가가 더 어렵다.
두 개의 시계
기술수출 계약은 계약금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임상시험, 허가, 판매실적 같은 조건을 통과할 때마다 성과금이 지급되는 구조가 보통이다. 공시에 적힌 ‘총계약 규모’는 모든 단계가 성공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최대액이다. 계약금은 이미 받을 돈에 가깝지만 마일스톤은 조건부다. 임상에 실패하거나 상대 회사가 개발 전략을 바꾸면 뒤의 금액은 오지 않는다. 권리 반환 조항도 이 불확실성의 일부다.
반대로 계약 해지는 현재가치를 바로 바꾼다. 예정된 연구개발비와 성과금, 해외 판매 가능성이 줄어든다. 특히 앞서 큰 기술수출 성과가 이어진 제약회사의 경우 시장은 개별 계약을 회사 전체 연구개발 역량의 증거로 읽는다. 한 계약의 반환은 해당 후보물질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다른 파이프라인에 붙인 기대에도 영향을 준다.
회사의 시계는 정보가 발생한 때, 담당부서가 확인한 때, 경영진에게 보고한 때, 공시 담당자가 문안을 확정한 때로 나뉜다. 시장의 시계는 주문이 들어간 때와 체결된 때뿐이다. 회사 내부에서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상대방과 표현을 조율해야 한다는 이유가 생긴다. 투자자에게는 그 사이에도 거래가격이 계속 만들어진다. 공시제도는 두 시계의 간격을 줄이는 장치다.
거래소 공시규정은 상장법인에 중요 경영사항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공시하도록 요구한다. 다만 언론이 말하는 ‘늑장’과 법률상 의무 위반은 같은 말이 아니다. 악재를 회사가 언제 확정적으로 인지했는지, 그 정보가 공시 대상에 이를 만큼 구체적이었는지, 공시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합리적이었는지를 자료로 확인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도 회사 내부의 인지 시각과 보고 경로는 조사와 재판에서 증거로 다뤄졌다. 추정한 시각을 사실처럼 적으면 공시 문제를 설명하면서 또 하나의 정보 오류를 만들게 된다.
공시 지연과 미공개정보 거래는 다른 책임이다
공시가 늦었다는 판단은 회사의 의무를 묻는다. 미공개중요정보 이용은 그 정보를 직무나 관계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 공개 전에 특정 증권을 거래했는지를 묻는다. 정보의 중요성, 미공개 상태, 취득 경로, 거래 시점이 각각 입증돼야 한다. 회사의 공시 절차가 부실했다고 해서 그 사이의 모든 매매가 곧바로 불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공시시한 위반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내부자가 확정된 악재를 이용해 거래했다면 별도 책임이 생길 수 있다.
금융당국과 수사기관은 한미약품 사건에서 회사 임직원과 외부로 전달된 정보의 흐름, 공시 전 주식거래를 조사했다. 일부 관련자에게는 미공개정보 이용 등에 관한 형사 판단이 내려졌다. 회사와 임직원, 1차 정보수령자와 2차 정보수령자의 법적 지위는 같지 않았다. 한 사람의 유죄나 무죄를 회사 전체의 공시책임에 그대로 옮겨서는 안 된다. 공시규정상 제재, 행정상 제재, 형사재판은 판단 대상과 입증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책임을 가볍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책임의 정확한 주소를 찾기 위해 필요하다. 공시 담당부서가 늦게 움직였다면 공시통제의 문제다. 정보를 접한 임직원이 거래했다면 정보 이용의 문제다. 사내에서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넓게 공유됐다면 보안과 접근권한의 문제다. 경영진이 호재와 악재의 발표 순서를 이용해 시장의 반응을 관리하려 했다면 의사결정의 목적까지 살펴야 한다. 서로 다른 문제를 ‘늑장공시’ 한 단어에 넣으면 고쳐야 할 절차도 흐려진다.
기술수출 공시를 읽는 순서
투자자가 기술수출 공시에서 가장 먼저 볼 것은 제목에 적힌 총액이 아니다. 첫째, 반환할 의무가 없는 계약금이 얼마인지 본다. 둘째, 임상 단계별 성과금의 조건을 확인한다. 셋째, 상대방이 개발을 중단하거나 권리를 돌려줄 수 있는 조항을 찾는다. 넷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 본다. 다섯째, 계약 상대방의 독자적인 해지권과 후보물질의 안전성 정보를 함께 읽는다.
예를 들어 총액 1조 원 계약에서 계약금이 500억 원이고 나머지가 임상과 허가에 달려 있다면, 1조 원을 현재 매출처럼 계산할 수 없다. 성공확률과 소요기간, 추가 비용을 반영해야 한다. 바이오 기업의 가치는 미래 현금흐름에 기대는 비중이 크다. 그래서 정보 하나가 가격을 크게 바꾸지만, 그 정보의 제목만 읽으면 기대와 현금이 섞인다.
회사가 갖춰야 할 통제도 같은 순서로 설계할 수 있다. 계약 담당자는 체결과 해지 정보를 발생 즉시 공시 담당자에게 넘긴다. 공시 담당자는 중요성과 공시시한을 검토한다. 법무·연구개발·재무 부서는 문구를 확인하되 발표를 불필요하게 늦추지 않는다. 서로 반대되는 정보가 동시에 발생하면 각각 따로 공시할지, 한 문서에서 함께 설명할지 결정 기준을 미리 정해야 한다. 정보 접근자 명단과 거래 제한도 자동으로 연결돼야 한다.
이 절차는 어느 부서가 더 중요하다는 문제가 아니다. 연구개발 부서는 임상적 의미를 알고, 재무 부서는 금액의 의미를 안다. 법무 부서는 계약이 확정됐는지를 본다. 공시 담당자는 시장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네 시선이 같은 결재선 안에서 만나야 한다. 공시는 문안을 작성하는 마지막 업무가 아니라 중요정보가 생기는 순간 시작되는 업무다.
공시통제에서 자주 생기는 착오는 ‘확정’이라는 말을 너무 늦게 잡는 데 있다. 계약서에 최종 서명이 없더라도 상대방이 권리 반환 의사를 철회할 수 없는 방식으로 통보했고 회사의 경제적 권리가 달라졌다면 시장 중요성은 이미 생길 수 있다. 반대로 협상 중 제안이나 내부 검토만으로 공시하면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가격을 흔든다. 담당자는 법적 확정성, 발생 가능성, 금액 효과, 투자자 판단 영향을 따로 평가해야 한다. 한 항목을 이유로 나머지를 보지 않으면 공시는 지나치게 빠르거나 늦어진다.
거래시간도 중요하다. 장 종료 뒤 악재를 알게 됐다고 해서 다음 날 장중까지 기다릴 이유가 자동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전자공시와 거래소 협의를 통해 개장 전 알릴 수 있는지 먼저 검토해야 한다. 번역이나 상대 회사와의 문구 조율이 필요하면 확인된 핵심사실을 우선 공시하고 세부내용을 보완하는 방법도 있다.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하게 다듬은 홍보문이 아니라 현재 확정된 사실과 아직 정해지지 않은 부분의 경계다.
이사회에는 공시 건수보다 공시 지연시간을 보고할 필요가 있다. 중요정보 발생에서 담당자 통보, 경영진 승인, 거래소 제출까지 걸린 시간을 사건별로 기록하면 병목이 보인다. 임직원 거래 제한이 어느 시점에 자동 발동했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사고가 난 뒤 규정을 준수했다는 답보다 정보가 어느 책상에서 몇 시간 머물렀는지가 통제를 개선하는 데 유용하다.
같은 날을 다르게 산 사람들
공식 거래기록은 공시 전후의 가격과 거래량을 보여준다. 재판기록은 특정 정보가 누구에게 전달됐고 어느 계좌에서 거래가 이뤄졌는지를 보여준다. 그 자료만으로 모든 투자자의 생활을 복원할 수는 없다. 확인되지 않은 대화나 후회를 만들어 넣을 이유도 없다. 다만 같은 날의 정보 격차가 손익의 격차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개인은 첫 번째 공시를 보고 주문할 수 있었다. 회사의 실무자는 두 번째 정보가 내부 절차를 통과하는 시간을 지켜봤다. 정보를 먼저 받은 사람에게는 팔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시간이 있었다. 정보가 없던 투자자에게는 선택의 전제가 없었다. 자본시장이 공시의 속도를 요구하는 이유는 성급함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거래 당사자에게 가능한 한 같은 전제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사건 뒤 바이오 기업의 기술수출 공시에는 계약금, 마일스톤, 해지 가능성에 관한 설명이 전보다 세밀해졌다. 그렇다고 정보 비대칭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임상과 계약은 계속 바뀌고 상대 회사의 전략은 한국 시장의 거래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제도는 모든 정보를 동시에 만들 수 없다. 대신 회사가 중요정보를 인지하고 공시하기까지의 시간을 설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거래소의 조회공시와 매매정지는 정보 격차가 큰 순간에 시간을 사는 수단이다. 하지만 회사가 정보를 늦게 넘기면 거래소도 움직일 근거가 없다. 시장을 잠시 멈추는 권한보다 회사 내부에서 중요정보를 즉시 올려 보내는 통로가 먼저다. 공시의 속도는 작성자의 손보다 조직의 보고 구조가 결정한다.
2016년 9월의 두 공시는 모두 전자공시 화면에 남았다. 두 문서의 간격은 몇 줄로 확인된다. 그러나 그 사이 체결된 거래는 되돌릴 수 없다. 시장에 같은 하루는 없었다. 정보를 가진 사람과 기다린 사람의 하루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