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거리에서는 신용카드를 만들면 사은품을 주었다. 소득과 상환능력을 세밀하게 확인하지 않은 발급도 많았다. 현금이 필요하면 은행 대출심사 대신 현금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카드 한 장은 결제수단이면서 짧은 대출창구였다. 여러 장을 번갈아 쓰면 당장의 결제일을 뒤로 미룰 수 있었다.
정부는 외환위기 뒤 내수와 세원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신용카드 사용을 장려했다. 소득공제와 영수증 복권 같은 정책이 도입됐다. 카드 사용액은 빠르게 늘었다. 정책은 현금거래를 줄이고 소비를 지지하는 효과를 냈지만, 카드사의 회원확대 경쟁과 현금대출 증가도 함께 진행됐다. 발급 장수와 이용액이 성장의 지표가 되면서 갚을 능력을 확인하는 일은 뒤로 밀렸다.
신용판매와 현금서비스는 돈의 흐름이 다르다. 신용판매에서는 카드사가 가맹점에 먼저 대금을 주고 회원에게 결제일에 받는다. 현금서비스는 카드사가 회원에게 현금을 직접 빌려준다. 둘 다 결제일까지 카드사의 자금이 들어가지만 현금서비스는 소비 목적과 상환재원이 더 불명확할 수 있다. 당시 카드사 수익에서 현금서비스와 카드론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카드사는 회원이 갚을 돈을 기다리는 동안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예금을 받을 수 없으므로 카드채와 기업어음(CP), 자산유동화증권 등을 발행했다. 평소에는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을 새 채권으로 갚을 수 있다. 연체가 늘고 카드사의 신용이 의심받으면 투자자는 새 채권을 사지 않는다. 회원의 연체가 카드사의 손실이 되고, 손실 우려가 자금시장 경색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2002년 이후 가계의 카드 연체가 늘었다. 카드사는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했고 수익과 자본이 줄었다. 2003년 SK글로벌 회계사건으로 채권시장의 신용불안이 커지자 카드채도 다시 평가받았다. 카드채가 편입된 머니마켓펀드(MMF)와 채권형 펀드에서 환매 압력이 나타났다. 카드 이용자의 연체가 카드사, 투신사, 단기금융시장으로 이어졌다. 카드대란을 가계채무 문제로만 보면 이 연결을 놓친다.
정부와 채권단은 카드사의 유동성을 지원하고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일부 회사는 합병되거나 경영권이 바뀌었고, 카드 발급과 현금대출 규제가 강화됐다.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사람이 급증하면서 개인회생과 채무조정 제도의 필요성도 커졌다. 시장안정 조치는 카드채의 급격한 매각과 결제망 불안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과거의 영업관행에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
미래소득이 오늘의 한도가 될 때
확정된 사실은 카드 발급과 현금대출이 급증한 뒤 연체율이 상승했고, 카드사 자금조달이 어려워져 구조조정과 시장안정조치가 시행됐다는 점이다. 기관 판단은 감독당국의 검사와 건전성 조치, 정부의 정책평가에 담겨 있다. 개별 경영진의 형사·행정 책임은 회사와 행위별로 확인해야 한다. “정부가 소비를 장려했으니 개인 책임이 없다”거나 “개인이 과소비했으니 정책과 영업 책임이 없다”는 양쪽 단정은 돈의 흐름을 설명하지 못한다.
카드 이용자에게 한도는 소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도는 카드사가 허용한 최대 채무액이다. 사용한 순간 미래의 월급에서 빠져나갈 돈이 된다. 결제일에 1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연체이자가 붙고 신용평가에 반영된다. 다른 카드의 현금서비스로 막으면 원금은 줄지 않고 비용만 늘어난다. 여러 카드의 결제일이 다르면 빚의 총액을 한눈에 보기 어려워진다.
당시 ‘신용불량자’라는 말은 개인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낙인으로 쓰였다. 실제로 무리한 소비와 대출을 반복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청년실업, 소득 감소, 과도한 한도, 길거리 모집, 카드사의 심사 경쟁이 같은 시기에 작동했다. 채무를 갚을 책임과 책임 있는 대출을 할 의무는 동시에 존재한다. 한쪽을 말한다고 다른 쪽이 사라지지 않는다.
카드사의 보상구조도 봐야 한다. 신규회원 수와 이용액이 영업성과가 되면 발급심사는 성장의 장애물로 취급될 수 있다. 손실은 연체 뒤 나타나지만 회원 모집 실적은 즉시 잡힌다. 판매와 손실의 시계를 맞추려면 회원의 장기 상환성과를 성과평가에 반영하고, 현금대출 한도를 소득·다중채무와 연결해 관리해야 한다.
카드대란 뒤 개인신용정보와 건전성 규제가 강화되고 채무조정 제도가 정비됐다. 오늘은 과거보다 발급심사와 다중채무 정보가 많다. 그러나 간편결제와 후불결제, 리볼빙 같은 새 형식이 같은 질문을 되살린다. 결제수단처럼 보이는 서비스가 실제로는 얼마의 금리와 수수료가 붙는 신용인지 확인해야 한다.
리볼빙은 결제금액 일부만 갚고 나머지를 다음 달로 넘기는 약정이다. 연체를 피하는 기능이 있지만 원금이 자동으로 줄어드는 상환계획은 아니다. 새 카드 사용액이 더해지면 이월잔액이 늘 수 있다. 최소결제비율만 강조하고 총 이자와 완납 예상기간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용자는 정상결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2003년의 현금서비스와 상품명은 달라도 미래소득을 당겨 쓰는 구조는 닮아 있다.
카드채 투자자도 카드사의 자산구성을 봐야 한다. 이용대금채권의 연체율, 대환대출 비중, 조달만기, 유동성자산을 함께 확인한다. 평균 연체율이 낮아도 특정 연령·상품군에 부실이 집중될 수 있다. 카드사가 짧은 CP에 많이 의존하면 자산의 회수보다 조달만기가 먼저 온다. 신용손실과 유동성위험을 따로 스트레스 테스트해야 한다.
정책은 카드 사용액 증가만 성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결제의 투명성, 소비 증가, 가계채무, 카드사 건전성을 같은 표에서 봐야 한다. 한 정책이 탈세를 줄이면서 과잉신용을 늘릴 수 있다. 좋은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이 부작용을 검토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감독지표가 정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위험은 몇 년 뒤 연체율로 나타난다.
채무조정은 빚을 없애 주는 상이 아니다. 상환기간과 이자를 조정해 생계와 변제를 함께 가능하게 하는 절차다. 이용자가 너무 늦게 신청하면 연체이자와 추심비용이 늘고 일자리와 주거가 흔들릴 수 있다. 금융회사는 연체 초기에 채무조정·개인회생 정보를 알려야 한다. 자기책임은 도움을 요청할 기회를 빼앗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용정보의 정확성도 중요하다. 연체정보는 금융회사 사이에 공유돼 새 대출과 카드발급에 영향을 준다. 잘못 등록되거나 상환 뒤 갱신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경제생활이 막힌다. 이용자는 신용정보를 열람하고 오류 정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며, 금융회사는 등록 근거와 보존기간을 알려야 한다. 위험관리를 위한 정보가 사람을 영구히 배제하는 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카드 모집인의 설명책임도 회사의 책임과 연결된다. 외부 모집인이 사은품과 혜택만 강조해도 계약은 카드회사와 체결된다. 모집수수료가 발급 건수에만 연동되면 소득확인과 이용조건 설명이 약해진다. 회사는 모집채널별 연체율과 민원을 추적해 보상과 계약유지를 조정해야 한다.
가계부채 통계에서는 이용잔액과 한도를 구분한다. 사용하지 않은 한도도 위기 때 급격히 인출될 수 있어 카드사의 유동성 위험이 된다. 반면 모든 한도가 실제 빚은 아니다. 정책당국은 사용액, 현금대출, 이월잔액, 연체전이율을 함께 봐야 한다. 하나의 총액으로 가계의 상환부담을 판단하면 취약차주가 보이지 않는다.
2003년의 기록을 읽는 이유는 과거의 소비문화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금융 접근성이 빠르게 넓어질 때 심사와 교육, 채무조정이 같은 속도로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편리한 신용은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만 손실이 드러나는 시점은 늘 뒤에 온다.
카드를 사용할 때 확인할 것
- 카드 한도와 실제 월 상환가능액을 구분했는가. - 일부결제금액이월약정, 현금서비스, 카드론의 연 환산비용은 얼마인가. - 여러 카드의 결제예정액을 한 날짜 기준으로 합쳐 봤는가. - 결제일을 넘기면 신용점수·연체이자·추심이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가.
카드는 오늘의 계산을 짧게 만들었다. 계산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래 날짜에 도착한 계산서는 개인의 월급을 지나 카드채와 금융시장까지 이어졌다.